서로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는 과거 어느 시대에서도 쉽게 해결되지 못했던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였다. 인간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어야 할 종교가 집단과 집단의 대립, 나라와 나라의 대립을 만들고 심지어 전쟁으로 발달하는 경우가 역사 속에서 수 없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종교의 대립을 한마디로 정의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분명 우리에겐 종교를 뛰어 넘은 인간적인 교류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인도 무굴제국의 3대 황제였던 악바르 대제의 삶과 사랑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흔히 인도 타지마할로 대표되는 무굴제국은 16세기 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도 전역을 통치한 이슬람의 왕조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는 국민 대부분이 힌두교를 믿고 있는 힌두교의 대표적인 나라이다. 이 힌두의 나라에 이슬람 왕조가 자리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악바르 대제는 이런 혼란기 속에 무굴제국의 3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나이 고작 13세였다. 어린 악바르를 황제로 만들어준 인물은 아버지 후마윤의 절친한 친구이자 장수였던 바이람 칸이었다. 바이람 칸은 어린 악바르를 도와 무굴의 영토를 넓히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사실은 어린 왕의 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실권자에 가까웠다.
5년 뒤 악바르가 18살이 되는 해, 바이람 칸의 권력이 너무나 거세진 것을 느낀 악바르는 그를 숙청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큰 권력의 뒤엔 그 세력을 저지하려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악바르는 그 반대 세력에 힘을 보태 바이람 칸을 추방하고 그의 측근을 제거하며 자신의 왕권을 굳건히 세우게 된다.
이제 무굴의 유일한 왕이자 가장 큰 권력의 핵심이 된 악바르 황제는 인도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가 내세운 방법은 전쟁을 통한 정복과 정치적으로 이용한 혼례식이었다. 악바르는 자신의 여동생을 상대방의 왕자에게 시집보내거나 상대 나라의 공주들을 자신의 아내로 만드는 방법을 이용해 우호적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 중 라자흐스탄의 암베르 출신 조다 바이 공주가 있었다. 조다 왕비는 사실 어린 시절부터 정해진 약혼자가 있는 몸이었다. 평생 약혼자와의 혼례만을 기다려왔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혼담에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독실한 힌두교의 신자였던 그녀가 생판 모르는 이슬람의 황제의 세 번째 왕비로 간택되어 이슬람의 왕비가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조다 바이의 아버지는 이번 혼례를 거절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결혼이 성립되면 무굴제국과 라지푸르족은 동맹을 맺을 수 있고, 그들의 영토까지 보장받을 수 있지만 거절할 경우 곧바로 나라가 망할 위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힌두교의 공주가 이슬람의 여왕이 되어 버렸다. 아그라의 붉은 성에 도착한 조다 바이는 낯선 이슬람의 문화에 혼란을 겪어야 했다. 왕을 평생 보살폈던 유모와 그의 아들은 미천한 힌두교의 여자를 여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듯 했고, 그녀를 모함하여 과거 정혼 자와 몰래 밀회를 한다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왕은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지킬 줄 알았고, 다른 종교와도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악바르 황제가 대제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황제는 자신의 힌두교도 여왕을 무굴 왕국의 여왕으로 인정받게 만들었고, 무굴제국에 퍼져있는 종교대립과 차별된 과세법을 모두 철회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악바르는 무굴제국을 하나의 완벽한 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왕이었다. 거대한 대륙 인도의 다채로운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려 했고, 아내를 지극하게 사랑했으며, 자신과 대립되는 생각에도 마음을 열 줄 아는 위대한 황제였다. 만약 그와 같은 이해심과 포용력이 있다면 종교에 관한 전쟁과 대립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