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말로는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마지막 황후는 일본 군인의 손에 유린당해 원치 않는 아이까지 임신했고 끝내 정신병을 앓다가 감옥에서 죽어야 했다. 마지막 황제인 푸이 또한 처참한 최후로 빈민가를 전전 하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이렇게 드라마틱한 결말로 막을 내린 듯 했다. 하지만 거대한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청나라의 최후엔 숨겨진 반전이 있었다.
모든 비극은 러브스토리로 비롯된다. 사랑에 눈 먼 사람들은 그들 앞에 가족과 나라를 내세워도 사랑밖에 보이지 않는 듯하다. 청나라의 14번째 왕녀로 태어난 금벽휘(金璧輝)의 삶이 그랬다. 청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 북경에 거대한 궁전에서 200명이 넘는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던 그녀의 가족은 가지고 있는 영토만도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그들이 가진 재산도 상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청나라가 쇠해지자 그들의 윤택한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때 왕녀의 가족이 선택한 길은 적국인 일본의 손을 빌리는 치사한 방법이었다.
왕녀의 가족은 그녀를 일본인 ‘카와시와 나나’에게 양녀로 보내고 이름을 가와시마 요시코로 창씨개명을 해 버린다. 더 이상 청나라에 기댈 것이 없어진 요시코는 과감히 국적을 바꾸고 일본인으로 살게 되었다. 일본에서 생활하며 일본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청나라 왕녀 못지않게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수업 도중 중국을 비하하는 발언이 나오면 그 즉시 반발 하는 등 청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17세가 된 카와시마 요시코는 중국에 있던 친 아버지의 사망 이후 큰 심경 변화를 겪게 됐다. 중국 왕녀의 품위를 지키고 아름다움을 과시했던 그녀가 돌연 머리를 자르고 남자처럼 옷을 입으며 말을 타고 다니는 남장 여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가족들의 간섭이 있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그녀의 여성성을 되찾기 위해 만주의 왕족과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을 고칠 순 없었다. 3개월의 짧은 결혼 생활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고집은 더욱 완강해졌다.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의심조차 못할 정도로 완벽한 변장을 하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일본 정보국 소속이었던 타나카 타카시를 만난 순간부터였다. 그녀는 타나카를 보는 순간 비극적인 사랑에 빠져 버렸다. 타나카는 그녀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일본 정보국에서 배울 수 있는 스파이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총을 쏘는 것부터 암호 해독, 기밀문서 압수, 변장술에 외국어까지 치밀하게 스파이교육을 시킨 것이다.
일본 정보국에선 중국 왕녀 출신의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중국 정부에 접근이 가능했고 중국 군부에도 접근할 수가 있었다. 일본 정보국은 그녀에게 무려 1만 엔이라는 엄청난 자금을 주고 중국군에 접근을 명령했다.
그녀의 활동은 일본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큰 활약을 펼쳤다. 황족 출신임을 앞세워 중국 국민들을 선동하고 국가 기밀문서를 빼돌려 일본으로 넘겨 버렸다. 청일 전쟁의 전초전이 된 상하이 사변 또한 그녀의 작품이었다. 중국인들을 거침없는 언변으로 선동한 그녀는 상하이에 있던 일본인 승녀 다섯 명을 집단으로 구타해 살해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일본인 승녀 역시 그녀가 교묘하게 짠 시나리오의 인물이었다. 일본은 자국의 승녀가 중국에서 죽은 것을 계기로 청일 전쟁에 불씨를 당겼다. 그 당시 상하이에 있던 일본인들은 중국의 공장을 불태우고 중국인 사상자를 키웠으며 중국에겐 반일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 나라의 왕녀가 자신의 나라를 적국에 넘기고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패전국이 된 청나라는 일본 손으로 넘어가고 청나라의 비극적 결말은 그렇기 시작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미국 앞에 패전하면서 그녀의 삶도 끝이 났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그녀 체포하기에 이르렀고 총살형 판결을 내려 버렸다. 그녀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총살당해 죽었다. 하지만 일설에서는 그녀가 다른 곳으로 도피해 버리고 그녀와 닮은 여자를 대신 총살 시켰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청나라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일본 최고의 스파이에 대한 진실은 이제 아무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