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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 칼럼
황실 가문이 발칵 뒤집어진 이유
최초작성날짜 : 2010-11-15 10:53:01, 글자크기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내 아들이 파란 눈을 가진 금발의 여성을 데리고 와 며느리로 삼아달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뛸 사람이 많았을 테지만, 요즘은 점점 늘어나는 ‘다문화 가정’의 추세에 따라 ‘사랑한다면’ 고개를 끄덕여 줄 부모도 많아졌을 것이다. 유난히 우리나라는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소극적인 것 같다. 처음 문호를 개방할 때 역사적 충돌이 있었던 만큼 우리의 피 속에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더욱이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여겨지는 결혼을 국제적으로 하겠다고 나서는 자식이 있다면, 매우 혼란스럽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의 역사에도 국제결혼이 있었다. 고려 왕실과 원나라 공주와의 정략결혼이 아닌 서로 사랑하여 이루어낸 국제결혼이 있다는 뜻이다. 때는 1958년,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황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미약했던 그때 그곳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 이유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가 한 명의 외국인 아가씨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왔다는 그들에게 황실 가문은 반대를 외쳤다. 이름만 허울 좋게 황실일 뿐 모든 것이 일본의 뜻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던 그 시절,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도 엄밀히 말하면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왕녀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강제적으로 결혼한 영친왕은 아들 ‘이구’를 낳았지만 순수 조선 혈통을 잇지 못한 데 큰 자책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토록 황실 가문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이구와 그 외국인 아가씨는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을 했다.

외국인 아가씨의 이름은 줄리아 멀록, 그녀는 192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광산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새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살았다.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그녀는 뉴욕에서 디자인을 공부하여 아이엠 페이라는 건축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이구와 만나게 되었다. 스물일곱의 이구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던 줄리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구를 통해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서로에게 강한 이끌림을 받은 둘은 1959년 10월 25일, 뉴욕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하와이 등지에서 머물다가 1963년에 한국에 돌아와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냈다. 이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줄리아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외국인이 대한제국의 황실 문화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줄리아는 이런 모든 시선을 불식시켰다. 시어머니인 이방자여사는 줄리아가 외국인만 아니었더라면 최고의 왕실 며느리감이었을 것이라고 늘 칭찬했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줄리아의 성품을 치켜세워 줬다. 고부간은 물론, 시부와도 사이가 좋았던 줄리아는 한 가지 흠이 있었다. 황실의 대를 잇지 못한 점, 그녀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점은 종친들에게 좋지 않게 작용했고, 그들은 이구와 줄리아를 별거 시켰다. 마침 그때 사업이 실패하면서 이구는 1979년에 일본으로 떠나 줄리아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결국, 1982년 둘은 이혼을 했다. 그 이후에도 줄리아 여사는 한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바느질을 가르치며 살았으나, 극심한 생활고가 뒤따랐다. 결국, 아픔을 간직한 채 하와이로 돌아갔다.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둘의 마지막은 좋지 않게 되었지만, 줄리아는 늘 이구를 사랑했다고 한다. 2005년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이구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에도 그녀는 한국에 들어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언젠간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지 희망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그만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을 사랑했던 파란 눈의 외국 여인 줄리아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기억되지 못한 채 잊혀지고 있었다.

이구와 줄리아의 사랑은 어쩌면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황실 국제결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이 좋은 모습으로 이루어졌더라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고정관념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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