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애견인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의 애견인 비율이 무려 21%가 넘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21%면 다섯 명 중 한 명 이상이 애견을 키운다는 뜻인데, 한 가구에 4인이 산다고 했을 때 거의 모든 가정에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결론이 나온다. 과거엔 애완동물이 단순히 개와 고양이, 새, 금붕어 정도가 전부였고, 조금 파격적인 동물로 산에서 직접 잡은 다람쥐를 새장에 넣고 키우곤 했었다. 요즘은 애완동물의 종류가 수십, 수백 가지로 포유류에서 파충류, 곤충과 연체동물 까지 지상에 있는 거의 모든 동물들이 애완동물화 되어가고 있다.
물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합법적으로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동물에 대한 책임감이 더한다면 건강하고 행복한 애완동물 문화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주 가끔 애완동물에 대한 책임을 사람에 대한 책임보다 더 강하게 느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애완동물은 주인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생명체다. 밥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도 주인의 손이 닿아야만 해결이 가능하다. 귀찮다고 해서 밥을 잔뜩 주고 신경 쓰지 않으면 엄청난 돼지가 되거나 잘못될 경우 사망할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동물들을 집에 두고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가 매우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동물들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비싼 돈을 주고 동물 호텔에 잠시 맡기는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
애견인들에게 애인이 생길 때도 문제가 생긴다. 만약 동물을 좋아하는 애인이라면 함께 애견 정보를 나누며 돈독하게 정을 나누고 살 수 있다. 애완동물의 역할이라는 게 원래 남들과 좀 더 쉽게 교류하고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 이 애완동물이라는 존재가 남녀 간의 사랑까지 깨버리는 독한 존재로 변할 때도 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인 여자는 어린 시절 강아지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었다.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그녀에게는 새끼 때부터 키웠던 발발이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강아지에게 이름도 지어주고 매일같이 함께 놀며 친구보다 더 친한 친구로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아이들의 동심을 파괴하는 한 여름의 복날, 할아버지가 그녀를 다정하게 불렀고, 그녀는 아무 의심 없이 강아지를 할아버지 손에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그날 저녁 뭔가 푸짐한 고깃국을 먹었고, 그 후로 강아지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강아지에 대한 좋지 못한 추억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그 후 성인이 되고 스스로 강아지 한 마리쯤 책임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예쁜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강아지가 대략 10살쯤 되었을 때,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자친구 선별 조건은 딱 한가지였다. 강아지를 좋아해 줄 것. 다행이 그녀의 남자친구는 평소 개를 좋아하던 남자였고, 둘은 강아지를 자식처럼 키우며 사랑을 쌓아 갔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은 갑자기 시작되었다. 이 강아지가 남자친구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강아지라면 그저 귀여워하면 다 인줄 알았던 남자는 이 강아지의 기고만장함에 어이를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자 친구의 관심사는 오로지 강아지의 안녕과 행복뿐이었다. 개가 남자친구를 물거나 그의 물건을 박살내도 오로지 강아지의 편이었다. 개는 이 남자를 자신보다 훨씬 낮은 서열로 느끼고, 남자가 조금이라도 다가올 때마다 물어뜯는 기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이 커플은 강아지로 인해 깨지고 말았고, 그녀는 이 남자보다 자신과 자신의 개를 이해해줄 남자를 찾을 때까지 오랫동안 개와 함께 독수공방을 지켰다고 한다.
물론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그 동물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다 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동물이 좋아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심으로 동물을 사랑한다면 그 동물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나를 지키려다 모두를 잃는 것보다 동물에게 지켜야 할 선을 만들어 주는게 더 행복해지는 비법일거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