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역사를 보면 국교를 목적으로 국혼을 한 공주들은 언제나 바람 잘 날 없는 위태로운 생활을 해야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봐도 그렇다. 우리는 그녀의 화려한 삶과 비참한 최후만을 기억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낭비와 사치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예나 지금이나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나라다. 그들의 눈엔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에서 온 여왕이 눈에 차지 않았고, 그런 불편한 자리에서 빛나기 위해선 귀족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사치를 부려야 했다고 한다.
의순공주 역시 이런 핍박과 눈치 속에서 청나라의 신혼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다행이 그녀의 남편 도르곤 왕은 자신의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의 청나라는 어린 여인이 왕의 아내가 되어 살기엔 넘어야 할 시련과 고난이 많은 나라였다.
도르곤 왕은 의순공주의 아름다운 자태에 빠져 있었다. 그가 아내와의 첫날밤에 조선의 사신에게 아내에 대한 불평을 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조선의 특산품인 흰색의 매 ‘백송골’이라 부르며 그녀의 미색을 찬송했다고 한다. 의순공주도 이런 도르곤을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둘은 이렇게 오래토록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공주의 행복은 채 1년을 넘지 못했다. 도르곤은 청나라 최고의 실권자였다. 만약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사랑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면 청과 조선은 지금과 다른 역사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도르곤은 혼인을 올린 지 단 7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졸지에 과부가 된 공주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르곤이 급사한 이후 청에서는 그를 역적으로 몰아세우고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공주는 이제 과부 몸에 무일푼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역적의 아내라는 이름표까지 달면서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된 것이다.
당시 청나라는 남편의 아내와 여인들까지도 그의 재산 목록에 포함 배분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의순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편의 재산 목록에 끼어 고관대작들에게 첩으로 팔려가야 했다.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청의 황족 박락(博洛)에게 강제로 재가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의 나이 고작 18세였고, 청나라로 넘어 간지 2년도 채 되지 않았었다.
그녀는 또다시 새로운 남편의 첩실이 되어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새 삶 역시 오래 가진 않았다. 새신랑이었던 박락 역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급사했던 것이다. 의순 공주는 졸지에 두 번이나 남편을 잃은 과부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아무 의지할 곳도 없는 북경에서 홀로 3년을 버텼다.
이런 의순공주를 가엾이 여긴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친아버지 금린군 이개윤이었다. 북경으로 동지사를 온 그는 딸의 처지를 보고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이개윤은 청의 황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자신의 딸을 고향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요청했고, 황제는 기꺼이 가련한 여인의 귀향을 허락했다.
고향을 떠난 지 7년 만에 다시 돌아온 그녀는 더 이상 불행이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아무리 공주라 하여도 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은 모두 화향녀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공주를 가엾이 여긴 효종은 그녀에게 매달 곡식을 주며 그녀가 편히 살 수 있도록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슬픔을 모두 달랠 방법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첫 사랑이자 남편이었던 도르곤을 잊지 못한 의순공주는 무당을 불러 그의 혼령이나마 자신의 곁에 불러 오고 싶어 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외국 땅에서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고 돌아왔고, 귀향을 해서도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안타까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결국 이 모든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28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만약 그녀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와 조금만 다른 인생을 산 사람들을 매도하고 손가락질 한다. 이제는 이런 낡은 관습을 버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