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의해 밀려들어오는 성의 홍수. 그러나 정작 젊은이들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다양한 정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런데 성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과거의 어른들은 오히려 오늘날보다도 더 적절한 방법으로 청춘 남녀의 끊어 오르는 욕구를 풀어주었다고 하는데, 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에는 2차 세계 대전 전까지 농촌이나 어촌의 산간벽지 마을에 ‘젊은이의 집’이라는 것이 존재 하였다. 이곳은 마땅히 만날 공간이 없던 과거 시절 청춘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마련된 것이었는데, 이는 젊은 남녀들의 한창 때의 호기심을 풀어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배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실 ‘젊은이들의 집’에 대한 역사는 미개인 사회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 대륙, 남미 대륙, 인도 드라비다 족 등의 미개 사회에서는 ‘청년의 집’이라 칭하는 미혼 남자 집회소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숲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곳의 청년들은 다 같이 식사를 준비하거나 농경이나 수렵을 하며 지냈고, 젊은 미혼 여자들도 자유롭게 출입하며 남자들과의 연애를 즐겼다. 단 기혼의 남자, 여자는 출입을 엄하게 금했으며 이는 대게 마을 장로가 감독을 하여 관리를 하였다고 한다.
카 폴렌 슈타인의 연구에 의하면 인도 드라비다 원주민에 속하는 나그풀 족 사이에서는 마을 최고급 가옥이 바로 ‘청년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 집은 청년들이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공동으로 지은 것으로, 낮에는 일반에게 침소로 이용되었고 밤에는 갈 곳 없는 미혼 여성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들 뿐만이 아라 뉴 카레도니아 제도에 사는 청년들은 ‘바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집에서 기숙하며 동료와 사귀고 공동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또한 다른 마을 처녀들과 자유연애를 마음대로 행하였고, 마을 처녀들은 다른 마을의 바이를 방문하여 3개월 간 기숙하면서 남자들에게 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이에서 남자들의 상대자가 되어 주었던 처녀들이 나중에는 일종의 화대를 받고 마을로 돌아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마을 남자들은 유녀가 된 그녀들을 존중하고 기꺼이 아내로 맞이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별난 풍습인가. 또한 처녀들은 다른 마을의 바이에서 벌어 온 화대를 지참금으로 사용했으며, 개중에는 바이를 차례로 방문하여 막대한 지참금을 벌어들인 후 시집가는 여성들도 있었다. 이 청년의 집은 후에 발전, 변화하여 유희장, 집회소, 무도회장, 공회당, 재판소, 여관, 사원 등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남녀 사이의 구속과 소유욕은 우리를 지배하는 환경과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기에 공동 소유와 공동생활의 개념이 강한 미개인들에게는, 여성의 정조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여성의 ‘정조’라는 것은 장소와 시대에 따라 중요할 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정조에 집착하는 남성들의 고루한 의식은 미개인들보다도 못한 생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