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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 칼럼
3천 명의 남첩을 거느린, 중국 유일의 여황제
최초작성날짜 : 2012-07-03 12:58:35, 글자크기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3천 궁녀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보필하던 왕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낙화암에서 한꺼번에 떨어져 죽음을 선택했던 궁녀들. 그런데, 그들의 수가 과장되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백제의 궁이 3천 명의 궁녀가 살 정도로 크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500여명의 궁녀로 추정하는 역사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중국 역사에는 궁녀 3천을 거느린 황제가 있었다. 아니, 궁녀라고 하면 안 된다. 왜냐, 그들은 남자였으니까.

3천 년이 넘는 중국 역사에서 황제에 오른 유일무이한 여인, 무측천 측천무후. 중국의 3대 악녀로 손꼽히며,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친자식도 죽일 수 있는 강철심장을 지닌 그녀가 바로 3천의 남첩을 거느린 황제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남총들을 두둔하며, 역대 남자 왕들이 수많은 궁녀들을 후궁으로 두었다. 자신이 천하를 거머쥔 이상 3천의 남자 후궁을 두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건 맞는 말이다. 남자 왕들이 많은 후궁을 두고 오늘 밤은 누구의 처소로 들어야 하나, 고민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말이다.

측천무후는 많은 남자 후궁을 들여 취함으로써 자신의 후궁시절을 보상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세 명의 친자식으로 죽여 얻게 된 황제자리 이전에 그녀는 말단 궁녀로 처음 궁에 들어왔다. 당시 황제 당태종은 전국의 미녀들을 모두 입궐시키라는 명을 내렸는데, 목재상의 딸이었던 그녀는 빼어난 미모로 궁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미녀들이 다 모인 궁에서 그녀는 그저 그런 여인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2년 동안 외로운 후궁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재인(才人)’으로 지내다가 당 태종이 죽자 법도에 따라 절에 들어가 승녀로서 살게 되었다.

꽃다운 나이인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그저 황제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산 측천무후에게는 절 생활은 참으로 끔찍한 외로움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바로, 태종의 아들 고종이었다. 이 둘은 그녀가 후궁시절부터 친밀한 관계였다고 전해지는데 고종은 자신이 황제가 되자 절에 있던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그녀의 정치적 야망에 의한 악한 행동이 시작된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을 앞둔 이십대 후반이었다.

자신이 황후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을 총애하던 황후 왕씨에게 제 손으로 죽인 딸의 살인죄를 덮어씌운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이다. 그렇게 황후 자리에 오르고 나서 무후는 자신의 반대파 무리들을 죄다 숙청했는데, 팔다리를 자르고 산채로 항아리에 넣어 끓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종에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자신의 두 아들마저 독살시킨 후 스스로 황제가 되자 그녀는 중국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된다. 다양한 개혁을 단행하고 나라의 발전을 이룩한 타고난 정치가였던 측천무후. 기록에 의하면, 그녀의 남첩이 3천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중 단연 으뜸이었던 이들은 72세의 노년으로 접어든 그녀를 기쁘게 해 주던 미소년 장종창, 장역지 형제라고 한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그들을 너무도 총애해 무측천은 두 형제와 잠자리에 함께 들었다. 게다가 그들의 관직을 계속 높여주고 점점 늙어가는 자신을 대신해 국사를 돌보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성(性)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그들에게 나라를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남총에 불과할 뿐, 자신의 사후에 있을 그들의 정치적 기반 등은 생각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장 형제는 그것을 깨우치지 못했고 결국 무후가 병들자 새로운 황제를 모시는 무리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온갖 모략과 악행을 저지른 측천무후, 권력을 위해서 여인의 고유영역인 모성애마저 저버린 그녀에게 있어 수많은 남첩은 육체적 유희로나마 정치적 압박과 정신적 노고를 피해보려는 그녀의 도구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성욕과 권력욕 등 모든 욕구에 솔직했던 여인, 측천무후는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였으나, 사후에 다시 황후로 돌아갔으며 역사에는 황제의 이름으로 기록되지 못한 슬픈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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