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으로 맺어진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두 부부를 연결해주는 고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자녀란 가정을 지탱해주는 필수적 인물로 그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 시대에는 서로가 좀 더 깊은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엄격하게 산아를 제한했는데, 이러한 문화는 마치 유행처럼 퍼져나가 너도나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임신으로부터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자식에게 구애 받지 않은 채 보다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싶어 하던 당대 사람들은 틈만 나면 모여 아이가 없음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이야기했다. 아낙들은 부른 배를 안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입을 모았고 남편들은 아이들로 인해 자신의 사교생활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민들은 2, 3명의 아이만으로도 가정을 꾸려나가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유산계층으로 갈수록 그 숫자는 줄어들어 한두 명, 혹은 아예 낳지 않는 것도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대부분의 유산계층 여성들은 결혼 전까지는 외출이나 여행에 엄격한 제약을 받았다. 이런 구속 안에서 결혼은 자유의 도피처가 되었고, 그들은 유부녀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 후에야 극장구경이나 여행 따위를 즐길 수 있었다. 이러한 여성들에게 아이는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방해하는 장애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뿌듯함이나 안정감보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더 중요시 여겼던 여성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자유를 약간의 절제도 없이 허겁지겁 받아들였다. 자식이 없는데서 오는 자유로움을 위해 보다 안심할 수 있는 인공적인 피임 방법을 고안하기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난소 제거법은 임신의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으로 다가왔다. 결국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은 난소 제거법이라는 웃지 못 할 유행마저 만들어냈다.
하지만 난소 제거는 산아제한의 대중성에 비하면 그저 협소할 정도로 밖에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수술비가 너무나 비싸 중상층의 여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해 그 확률이 굉장히 낮았기 때문이었다. 출산 조절의 능력마저도 경제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상황 속에서 2세 출산의 책임은 무산계급이나 중간층계급에게로 미뤄졌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수술을 할 수 없는 가난한 여인들도 자유로운 삶이나 혼외 성생활의 짜릿함을 원했고, 마침내 그녀들의 꿈은 점점 위험한 방향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다.
빈곤한 농민층 여성들은 이제 막 태어나 첫 울음을 터뜨리려는 아이의 입을 막아 죽이거나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값싼 낙태시술을 받았다. 덕분에 무산계급의 출생률 또한 무서울 정도로 낮아졌지만 영아 살해라는 위험한 범죄행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낙태는 비밀에 붙여져 있는 금단의 것이었지만 인공유산에 대한 유혹의 손길은 여기저기에서 뻗어왔고, 심지어 신문에도 ‘월경을 늦추는 약’이나 ‘비밀을 요하는 일을 상담해드립니다.’라는 광고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산부인과는 인공유산을 원하는 여성들로 넘쳐났으며 처녀들 또한 현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유를 향한 여자들의 꿈이 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아이를 없앨 정도로 깊었던 것일까?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라는 모성애를 앞지른 집념이 어느 정도의 힘으로 여인들을 끌어당겼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연애 속 공감대> -LJ비뇨기과- www.lju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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