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도 원 나잇 스탠드가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나와는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씩 친해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없애는 것, 흥미로운 일이다. 사교성이 좋은 사람은 어딜 가나 환대를 받고, 소극적인 사람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사교성이 뛰어난 사람이길 바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과 사람이 만나 친해지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매우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일들이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다. 과거 유럽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일과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귀족 중에는 자기 영내의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에만 의존하여 생활하는 가난한 귀족도 있었다. 이들은 이름만 귀족일 뿐 행동은 그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 ‘뷔르텝베르크’의 ‘침메른 백작’의 연대기 속에 나오는 짧은 기록은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슈바르츠발트에 사는 어느 귀족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킬베르크 수녀원에 있는 가까운 친척 부인을 방문하려고 순례 여행길에 올랐는데, 남편은 자기 여동생이 그 수녀원에 있었기 때문에 아내가 수녀원을 방문하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아내가 설마 자기를 속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실은 그의 여동생이 친한 친구와 짜고서 아내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게롤트체크 백작이 네카 강 연안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발터에게 귀족의 부인이 소개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만남은 남자가 상대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런 조건에 발터가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얼굴이 밝혀지지 않는 만남은 귀족의 아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 둘은 칠흑같이 어두운 방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그는 비록 여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손의 감촉만으로도 그녀가 아름답고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밭터는 얼굴 모르는 아름다운 여인과 뜨거운 정사를 나누었고, 그녀 또한 남편과 다른 건장한 남자의 몸에 한껏 흥분했다. 둘의 정사는 그렇게 한밤중까지 계속 되었으며, 동틀 무렵에서야 겨우 곤한 잠에 빠져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만족스런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15-16세기 토착 소 귀족들의 성도덕 관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 귀부인들은 남편이 부재중 일 때 마부, 하인, 화부, 광대 등과 같은 영내의 백성들을 불러들여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워나갔던 것이다.
‘원 나잇 스탠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혼자만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본능적 욕구를 서로 준비된 상태의 남녀가 만나 하룻밤 사이 다독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 시대의 모습이다. 필자 또한 ‘원 나잇 스탠드’라는 행태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욕구에 따라 예전에도 존재했던 이런 모습들을 지금에 와서 비판하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르는 남녀와 그저 동물적인 섹스를 하다고 해서, 스스로의 성적 욕구가 얼마나 채워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저 새로움의 환희를 얻으며 욕구를 채우는 것 뿐 다음 날, 그 다음 날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감정으로 향하지 못하는 것에 허무함을 느끼지는 않을까. 연인이 없어 하룻밤을 즐긴다면, 자신의 몸을 조금 아껴두는 것은 어떨까. 다음에 만날 소중한 연인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