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주의자들의 탄압
요즘의 나체주의자들은 한 마디로 ‘세상에 이런 일이’ 감이다. 숲 속에서 나체로 생활하는 가족들이나 단체로 옷을 벗고 자전거 마라톤 하는 사람들은 뉴스에서나 가끔 볼 수 있다.
만약 현대에도 나체주의자들이 도시를 활보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경범죄로 체포돼서 벌금을 물고 억지로 옷을 입혀 귀가조치 시키거나 심각하게 정신병원 진료를 추천할 것이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노출증 환자를 보면 그 날 일진을 망쳤다고 생각하거나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성의 나체를 자신이 원해서 보는 것은 괜찮아도 억지로 눈에 띄어 보게 될 경우는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신기한 눈요깃감으로 일순간 이슈는 될 수 있어도 나체주의자들이 수십 명, 수백 명씩 도심 속을 걸어 다니고 같이 지하철을 타며, 밥을 먹고 쇼핑을 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거부반응은 나체주의가 탄압받던 시기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688년 대성당의 참사회에서는 대대적으로 젊은 남자들의 나체를 금지시켰다. 그 시기의 지식층들과 종교인들은 남성의 나체를 더 이상 순수한 자연의 모습이 아닌 남녀의 문란한 놀이로 여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금지조항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여전히 나체로 시내를 활보했고 잡히더라도 ‘말에게 물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고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 후 나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리게 된다. 한 번 걸렸을 때 금화 두 개, 두 번째엔 그 두 배, 세 번째는 그 세 배를 내게 만들고 적발을 한 경찰은 세금의 3분의 2를 주었다. 만약 나체의 사람들을 발견해 신고할 시엔 세금이 3분의 1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도시의 나체주의자들은 모두 옷을 입을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나체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던 젊은이들은 쉽게 옷을 입지 않았다. 말에게 물을 먹이며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간 젊은이들은 경관을 보는 즉시 수영을 해서 강 반대방향으로 빠져 나가기도 하고 심지어 물속에서 도망을 가다가 강물에 휩쓸려 죽기도 했다.
이제 단순한 벌금으로 나체주의자들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정부는 발견 즉시 국외로 추방시킨다는 강력한 법을 만들어냈다. 만약 추방 할 수 없는 신분일 경우 몽둥이나 채찍으로 때려 집까지 도망가게 만들고 그들의 값비싼 의복들과 장신구들을 빼앗아 버리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범법자를 잡아 셔츠만 입혀서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 하는 형벌을 내리기도 했고 아예 나체로는 물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법규도 모두 쓸모가 없었다. 파리는 여전히 누드로 활보하는 사람들 천지였고 그러한 법령으로 구속된 인물은 단 한 건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나타나면 즉시 물속으로 들어가 다른 쪽 제방으로 올라가기가 일수였기 때문에 쉽게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는 결단을 내린다. 파리 센 강에 ‘유독성’ 오염이 흐른다는 소문을 퍼트려 사람들을 내 쫓고 강을 폐쇄해 나체 수영을 일절 근절시킨 것이다. 더위에 지친 시민들은 비교적 남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야간 시간에 강에 들어가 수영을 하거나 시에서 지은 공공 수영장을 이용했다. 파리에서 지은 공공수영장은 처음엔 깨끗한 시설과 새로운 환경으로 주목받았지만 유독성이 흐른다는 강보다 더 진한 유독성을 갖게 되었다. 지저분한 관리로 인해 바닥엔 홍합이 자라고 깨진 유리가 돌아다녔으며 물 위는 수개월 동안 청소하지 않아 생긴 쓰레기와 물때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시민들은 꾸준히 수영장을 사용했다고 한다. 나체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일절 사라진 시기는 1779년 부르주와 혁명이 일어나면서 부터였다. 시민들을 귀족들의 나체 수영을 일종의 부르주와 들의 타락한 대표적인 형태라고 여겼고 그들에게 ‘수치심’이라는 큰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이 후 아담과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나체에 수치심을 느낀 사람들은 나체로 수영을 하는 것은 야만인과 다를 게 없다고 판단하기 시작했고 나체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근절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