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요?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여자 라디오 PD와 남자 사운드 엔지니어가 소리를 채집하는 여행을 다니며 서로 호감을 느낀다. 늦게까지 출장을 다녀온 후 집에 바래다주는 길, 마음속에 아쉬움은 가득하지만 표현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남자를 여자가 불러 세우며 묻는다.
“라면 먹고 갈래요?”
이는 십 수 년 전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의 한 장면이다. 물론 남자는 그날 밤 라면만 먹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소위 말하는 만리장성을 쌓았으리라, 왜냐하면 다음날부터 둘 사이는 연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연이었던 여배우가 무심한 듯 모르는 척 던진 ‘라면 먹고 갈래요’ 라는 대사는 지금까지도 남녀를 막론하고 호감, 또는 그보다 조금 더 가깝지만 연인은 아닌 애매한 관계에 있는 이성을 침대로 유혹하는 암호로 쓰이거나, 사귀고 있더라도 육체관계까지는 가지 않았던 연인들이 스킨십 진도를 섹스까지로 발전시키는 신호와도 같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라면’처럼 세계 여러 나라에도 은밀한 뜻으로 쓰이는 표현들이 있다면 어떨까? 물론 모두가 음식을 먹고 가라는 표현은 아니다. 음식에 관한 표현으로는 스페인의 “Poner la tarta en el horno" 가 있다. 이는 ”오븐에 케이크를 넣다“ 는 뜻으로, 문장 상으로는 케이크 반죽을 오븐에 넣어 완성된 케이크를 구워낸다는 의미이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성관계를 의미하는 암호로 종종 쓴다고 한다. 즉 ”라면 먹고 갈래요“ 대신 ”우리 오늘밤 오븐에 케이크 넣을까?“처럼 말하는 것이다.
반면 스웨덴은 "Parkera bussen" 으로, “버스를 주차하다”는 뜻이다. 우리 면허 체계에도 1종과 2종이 있듯 승용차와 버스 같은 대형차는 운전 방법도 다르고 일반 운전보다 더 어렵다. 그런데 보통 자동차도 아닌 버스를 주차한다는 말이 어떻게 성관계를 상징하게 된 것일까? 버스의 크기(?)와 그 다루기 어려움을 섹스에 빗댄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라면 먹고 갈래’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이 바로 ‘넷플릭스 앤 칠(Netflix and chill)’ 이라는 표현인데, 이는 미국에서 온 말로 넷플릭스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정해진 요금만 내면 무제한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우리나라의 IPTV와 같은 서비스의 미국판이라 할 수 있다. ‘넷플릭스 앤 칠’이란 ‘라면 먹고 갈래?’처럼 넷플릭스 보면서 놀래? 라는 뜻이다. 그런데 보통 넷플릭스가 드라마든 영화든 무제한 시청이 가능하기 때문에 밤새도록 TV를 보면서 노는 게 가능하고, 이에 자연스럽게 섹스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되므로 미국 남녀 사이에서 넷플릭스 앤 칠은 이제 원뜻보다 집에서 섹스하자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라면 먹고 갈래?” “오븐에다 케이크 구울까?” “버스 주차하고 갈까?” “넷플릭스 보면서 놀래?” 와 같은 말들은 노골적이지도 않고 성에 관한 낡은 비속어들처럼 남녀 모두를 민망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특히 한국의 ‘라면’과 미국의 ‘넷플릭스’는 거절해도 그만, 거절하지 않아도 정말 집에서 같이 라면만 같이 먹거나 밤새도록 드라마만 보면 그만이기에 서로 부담되지도 않는다. 성에 대해 공개적인 담론도 과거에 비해 자유로워졌고, 금기시되던 표현이나 편견들도 많이 깨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인 남녀의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말들은 말 한 마디로 관계가 어긋날 까봐 노심초사하면서도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말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