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디브 남쪽에서

더 레지던스의 비치 바. 몰디브의 햇빛과 바람, 모래가 만든 바다 빛깔이 아름답다.

지친다. 인천에서 싱가포르 창이 공항까지 5시간 30분, 창이 공항 대기 5시간을 거쳐 겨우 말레Male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왜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몰디브Maldives에 가야 하지? 고작 퍼런 바다를 보려고? 앞, 뒤, 옆을 둘러싼 신혼 여행객들은 심통을 더돋웠다. 불과 하루 전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얼굴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초췌한 얼굴들, 샴쌍둥이처럼 줄기차게 엉켜 있는 몸들… 아, 내 눈!

창이 공항을 떠난 지 4시간 30분 만에 드디어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승객 여러분. 이 비행기는 곧 말레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석 위로 뒤통수들이 일제히 떠오른다. 너 나 할 것 없이 창으로 향하는 시선들. 50대 호주 서퍼 무리, 270분 내내 쫑알대던 중국인 단체 관광객,서로에게서 눈을 뗄 줄 모르던 커플들 모두 어린애같이 창에서 코를 떼지 못한다. 뭐가 있길래 저러지? 곁눈질로 슬쩍 창밖을 훔쳤다. 거기에, 바다가 있었다. 몰디브의 바다, 여태껏 본 '에메랄드빛 바다'를 전부 거짓말로 만들어버리는 그 영롱한 옥빛. 나는 15시간의 비행 동안 "다시는 오나봐라, 몰디브." 를 실성한 듯 중얼거렸었다. 아무도 그 말을 못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팔루마 푸시, 더 레지던스

바다를 수영장처럼 품은 워터 풀 빌라로 가는 길. 더 레지던스에선 자전거를 타고 숲길과 바다 위를 누빈다.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우주 같은 바다를 누비고 있다. 여기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환초지대, 가푸 알리푸 아톨Gaafu Alifu Atoll이다. 수영에 서툰 내 손을 꼭 잡고있던 그가 반대편 손으로 급히 무언가를 가리킨다. 5시 방향, 어디서 많이 본 얼굴, 뾰족한 주둥이에 단춧구멍 같은 눈을 가진 진회색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보조 장비 없이 바다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일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스노클링을 하기 직전, 나는 구명조끼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튜브 없인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도 안 되는 꼬장을 부렸었다. "당신은 튜브가 필요 없습니다. 만약 수영못하면 스노클링을 포기하세요.

" 다이브 센터 직원의 단호한 거절.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도대체 튜브가 왜 필요하죠?"

인도양이 한눈에 보이는 비치 빌라의 거실. 바깥 데크로 나가면 수영장과 바다로 향하는 계단을 만난다.

그 진회색의 생명체가 상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처럼 초고속으로 머리를 들어올렸다. 입에 물었던 호흡기를 뱉어내고 놀란 얼굴로 따라 올라온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상어잖아요! 상어! 빨리 배 이쪽으로 오라고 해요!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 튜브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울부짖는 내 등을 다정하게 다독이며 그가 말했다. "진정해요. 쟨 베이비 샤크예요. 절대로 당신을 물지 않습니다. 채식주의자거든요." 농담까지 던져가며 여유 있게나를 달래는 수중 가이드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내가 처한 상황이 '응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 이런 망신이. 멋쩍은 얼굴을 들키기 싫어서 다시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거대한 바다거북, 파란 쥐치blue surgeonfish, 앵무고기parrot fish 같은 것이 발아래로 지나갔다. 색색의 산호와 물고기는 호주 그레이트배리어리프 Great Barrier Reef, 일본 오키나와Okinawa 등에서 실컷 봤지만 상어나 거북은 처음이었다. 잠수경에 김이 뿌옇게 서릴 때까지 우주의 꽃밭같은 인도양에 몸을 맡겼다.

몰디브에서 자주 만나는 동물, 도마뱀.

어젯밤 장장 16여 시간의 이동 끝에 도착한 이곳은 가푸 알리푸 아톨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팔루마 푸시Falhummaf Fushi(푸시는 디베히어로 '섬'이라는 뜻)다. '더 레지던스The Residence' 리조트만이 이 섬의 유일한 인적. 몰디브가 12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건 알았지만 한 섬을 단 한 곳의 리조트가 독차지한다는 사실은몰랐었다.

"몰디브는 100퍼센트 이슬람 국가예요. 몰디비안이 사는 섬엔 술 반입이 엄격하게 금지된다는 뜻이죠. 비키니 차림은 엄두도 못 내고요. 당신이 지금 들이켜고 있는맥주는 오직 리조트 아일랜드에서만 즐길 수 있습니다."

스노클링 후 낮술과 햄버거로 피로를 풀고 있는 내게 직원이 귀띔해줬다.

수도 말레에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가푸 알리푸 아톨엔 리조트 아일랜드가 단 4곳 뿐이다. 더 레지던스는 그중 가장 최근에 들어선, 가장 큰 규모의 리조트다. 94채의 단독 빌라로 이뤄진 단지는 리조트라기 보다 작은 마을에 더 가깝다.

비치 빌라에는 낮잠 자기 좋은 해먹이 있다.

오전 내내 몸이 퉁퉁 불 때까지 바다에서 놀고 낮술까지 마셨건만, 해는 아직도 중천. 오후 2시 전후엔 메인 수영장과 비치, 열대 나무가 무성한 산책로에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하루 중 볕이 가장 뜨거운 때, 허니무너들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빌라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을 이가없는 싱글, 아이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부부들에게도 선택지는 있다. 첫째로 추천하고 싶은것은 고단한 몸을 풀어줄 스파. 더 레지던스에는 클라란스가 운영하는 '스파 바이 클라란스'가 들어서 있다.

클라란스 스파는 뷰티 브랜드가 운영하는 스파 중에서 특히 보디케어가 강점이다. 몸에 지방이 쌓이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약초 '웅카리아 토멘토사'를 온몸에 발라보디라인을 잡아주는 '컨투어링 보디 트리트먼트'가 시그니처 테라피.

몰디비안의 일상을 구경하고 싶다면 배를 타고 인근의 섬으로 놀러나가는 '로컬 아일랜드 익스피어리언스'를 신청하면 된다. 몰디브 사람의 집을 구경하고 로컬 음식을 먹어보는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바다에서 놀고 싶은 이라면 낚시, 카약, 윈드 서핑 등 물에서 할 수 있는 놀이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팔루마 레스토랑에서는 격식을 갖춘 분위기에서 정찬을 즐길 수 있다.

무수한 선택지가 있었지만 나는 그냥 방에 있었다. 서울에서 낮 시간 내내 온전히 방에 있어본 적이 있던가? 선베드에 비치 타월을 깔아놓고 미니 바에서 시원한 맥주 한 병을 꺼냈다. 파라솔이 만들어준 그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적도의 무더위가 가혹하지만은 않았다.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여느 휴양객의 뻔한 낮. 몰디브에선 이 상투적인 휴식도 특별하다. 햇빛과 바람, 구름과 모래, 산호와 수초, 물고기가 만들어낸 바다의 빛깔은 정말이지 종일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다.

놀랍게도 4시간이 40분처럼 흘렀다. 어느새 석양 무렵. 어젯밤엔 비치 바의 바비큐 파티에서 매우 흡족한 식사를 즐겼다. 오늘은 더 레지던스의 파인다이닝, 팔루마레스토랑에서 정찬을 즐기기로 했다.

"정말 로맨틱하죠? 제가 이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오늘 나와 식사를 함께하기로 한 타이완 출신의 PR 디렉터 유진이 흥분된 목소리로 환영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바다 위에 낸 넓은 우드 데크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선셋 크루즈에 탄 기분이에요." 유진은 퀴즈 프로그램 사회자가 마지막문제의 정답을 맞힌 출연자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정확해요! 그게 바로 팔루마의 매력이죠." 3시간에 걸쳐 위장에 해산물과 양고기와 와인과 셔벗을 꽉꽉 채워 넣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오지 않은 몰디브는 서울보다 못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애인이 없어도 충만한 밤이었다.

가푸 알리푸 아톨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맑은 바다. 물빛만큼 아름다운 다이버의 몸짓.

돌아와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옷이 젖든지 말든지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칠흑 같은 망망대해와 마주했다. 빛이라곤 별밖에 없는 밤, 적도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바다 냄새. 영화 < 그래비티 > 에서 라이언 스톤이 우주에 혼자 남았을 때 기분이 이랬을까? 말할 수 없이 고독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게 다가온 우주. 나는 한참 동안 데크에 앉아 있었다. 발목을 잃은 사람처럼, 영원히 말을 잃은 사람처럼.

하다하 푸시, 파크 하얏트 하다하

파크 하얏트 하다하, 모던한 인테리어의 객실. 싱가포리언 출신의 건축가 찬 수 키안의 작품이다.

또 다시 배 위. 집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가푸 알리푸 아톨에 위치한 4개의 리조트 아일랜드 중엔 하얏트 그룹이 공들여 꾸민 '파크 하얏트 하다하Park Hyatt Hadahaa'도 있다. 보트는 약 30분간 바다를 가른다. 제티에선 제너럴 매니저부터 프라이빗 버틀러까지 10명 남짓한 직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볕만큼이나뜨거운 환영 인사에 기분이 우쭐해졌다.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안내받은 후 짐을 풀고 땀과 소금기에 젖은 몸을 씻었다. 스파로 향할 시간. 더 비둔 스파The Vidun Spa는 남몰디브에서 유일하게 몰디비안 스파 테라피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시그니처 프로그램은 '세하두Sehadu'. '밝히다'는 뜻의 디베히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생기 있게 밝힌다는 의미예요." 인도에서온 테라피스트가 결정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나를 위해 친절한 귀띔을 줬다.

특별한 추억을 원하는 허니무너라면 '프라이빗 디너'를 이용해볼 것. 바다와 루프톱, 숲 등 비밀스러운 장소에 둘만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뉴욕에서 온 신혼부부의 즐거운 한 때. 파크 하얏트 하다하는 셀러브리티들이 좋아하는 리조트로 유명하다.

몰디비안 테라피는 후추와 허브를 넣은 차가운 코코넛 티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형적인 몰디브식 환영법이다. 꽃잎을 띄운 물에서 족욕을 마치면 본격적인 마사지가 시작된다. 몰디비안 스파는 타이나 인도처럼 깊은 역사나 독특한 개성을 가진 건 아니다. 몰디브의 열대 숲에서 채취한 야생 장미에 로터스, 재스민 등을 섞은오일로 몸의 열기와 냉기를 조화시키는 테라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국식 안마처럼 경혈점을 강하게 누르거나 타이 마사지처럼 몸을 꺾거나 아유르베다마사지처럼 머리에 기름을 들이붓는, 신경을 거스르는 자극은 없다. 테라피스트는 1시간 내내 사려 깊은 손길로 굳고 찌든 몸을 살핀다. 마사지를 받는 동안은 바람피운 애인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자비가, 평온이 가득했다.

저녁 식사 전엔 비치 바에서 마련한 칵테일 타임을 갖는다. 파크 하얏트에 묵는 이들이 반드시 사수하는 시간이다. 인도양의 석양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싱가포르에서 온 부부, 독일인 모델 커플, 호주에서 온 게이 커플, 중국인 허니무너까지 모두 비치에 늘어놓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제임스와 나도 빈백에 몸을 맡겼다. 제임스. 서핑과 카야킹을 좋아하는 런던 출신의 영국인. 이곳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 남자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관계는 아니다. 그와 내가 그 낭만적인 석양을 바라보며 나눈 대화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알라 카르테로 즐기는 정찬.

"하얏트 그룹이 이 먼 곳에 리조트를 세운 이유는 뭐죠? 어휴.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기 정말 힘들었어요."

"가푸 알리푸 아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산호지대로 유명해요. 그리고 주변엔 유인도가 10개밖에 없습니다. 오염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곳이죠. 물이 정말 맑아요. 말레 인근의 섬들엔 리조트와 로컬 아일랜드가 많아서 이곳만큼 수질이 깨끗하진 않습니다. 다이빙을 좋아하거나 때묻지 않은 몰디브를 보고 싶다면 조금 고생스러워도 올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죠."

을 준비하고 있다.

파크 하얏트 하다하의 마케팅 디렉터, 제임스의 말처럼 몰디브 남쪽의 환초 지대는 다이버들에게(혹은 스노클러에게) 그레이트배리어리프에 버금가는 로망이다. 이곳엔 특히 틸라thila로 불리는 수중 지형이 많은데 수면에서 10여 미터 깊이 안에 섬같이 돌출되어 있는 지형을 뜻한다. 수중 동물들에겐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종이 매우 다채롭다. 오픈 워터 혹은 어드밴스드 자격증을 가진 다이버들은 '리브어 보드live a board(배 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며칠 동안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는 여행)'를 즐기러 남몰디브를 찾는다. 적도에서 북쪽으로 약 56킬로미터 위에 위치한 파크하얏트 하다하는 빌라의 데크에서 바로 바다로 뛰어들어도 리브 어 보드의 다이버들이보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배를 타고 나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수심이 얕은 곳에도 산호초와 물고기가 득실해서 팔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맨몸으로 물속 깊이 다이빙하는 느낌이 이럴까? 수영을 못하는 나는, 수중 가이드도, 도와줄 일행도 없는 주제에 이틀 내내 바다에서 허우적댔다. 물 먹어도, 쥐가 나도, 해파리가 나타날까봐 무서워도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

저녁은 보두 베루Bodu Beru의 밤. 보두 베루는 몰디브의 전통 음악을 뜻한다. 북 치는 남자와 노래하는 남자로 꾸려진 악단이 들려주는 북소리, 노랫소리가 잔잔한바람 소리만큼이나 아름답다. 그 노래, 알라 카르트로 차려진 화려한 프렌치 요리, 미남 제임스와 와인을 마시며 웃고 떠들었던 디너 타임은 말할 수 없이 로맨틱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누린 최고의 순간은 마지막 날 아침에 만났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커튼을 열고 부드럽고 바삭한 침대 시트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짐을 싸야하는데 몸을 움직이기가 싫어서 넋 잃은 사람처럼 창밖만 바라봤다. 바다만 있는 바다. 배도, 사람도, 새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는 빈 풍경. 갑자기 허공 위로 검은 것이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뭐지?

"가푸 알리푸 아톨에선 방에서 가끔 돌고래가 뛰노는 풍경을 볼 수 있어요."

다이브 센터의 스태프가 해줬던 귀띔이 떠올랐다. 그런 행운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므로 잊고 있었는데, 설마, 돌고래? 나는 3년 전 남아공 크루거 국립공원 안 로지의 야외 자쿠지에서 코끼리가 소변을 보고 어슬렁거리는 것을 목도한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로 꼽는다. 그 풍경을 마주하기 위해 28시간이 넘는 여정이 걸리는 남아공까지 날아갔었다. 오늘 아침, 침대에 누운 채로 창밖에서 돌고래가 날뛰는 장면을 목격했다. 몰디브는 30시간이 걸려도 올 만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