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도 갑을관계가 있다?-
최근 한 항공사 부사장이 땅콩 한 봉지 때문에 기내에서 진상을 부리다 마침내 비행기를 돌리기까지 한 일이 있었다. 외국의 경우였다면 기내소란죄로 바로 경찰에 체포될 수도 있었을 수준의 일이었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그 승객이 항공사 오너의 가족이자 부사장, 즉 '갑'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고 묵인되었다.
이처럼 계약 관계에서 일(돈)을 주는, 즉 발주하는 입장인 갑들이 자기 돈을 받고 일을 해주는 을들에게 불합리한 횡포를 부리는 것을 '갑질'이라고 부른다. 최근에서야 갑들의 부당한 처우가 주목받고 비판의 대상이 되어 '갑질'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지만 우리나라에서 갑질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관행에 가까웠다.
그런데, 연애에도 '갑질'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정해진 기간 동안 각자의 조건을 내걸고 연애를 하는 ‘계약 연애’를 말하는 것이냐고? 아니다. 계약기간과 계약서가 없어도 연애 '갑'은 존재한다. 물론 갑이 있다면 당연히 상대방은 을이 된다.
금전을 제공하지 않는 연애에서 갑과 을은 어떻게 구분할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보통 갑을 관계에서 돈을 제공하는 쪽이 갑이지만 연애에서는 사랑을 제공하는 쪽이 을이 된다. 연애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는 말을 기억하는지?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연애 관계에서 을은 항상 더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쪽이다.
연애 1년차인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3년이나 여자를 짝사랑한 끝에 구애에 성공했지만, 사귀기로 한 뒤에도 그의 처지는 짝사랑하던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만나는 날도, 약속 장소와 시간도 모두 여자에게 맞춰져 있었다. 밀가루 음식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여자 친구와 만날 때면 늘 파스타를 먹어야 했다. 여자는 자기가 바쁘면 약속 시간 1시간 전에도 취소해 버리는 것이 부지기수였지만 남자는 여자가 부르면 새벽 네 시, 다섯 시라도 재까닥 나가야 했다. 여자가 아무 말 없이 며칠씩 연락하지 않아도 그는 그저 기다려야만 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녀가 원할 때 언제든 보고해야했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말 그대로 사생활이었다. 그녀가 원하면 상사 눈치를 봐 가면서 연차라도 빼서 여행을 가야했고,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랫동안 정성들여 준비한 이벤트라도 곧장 쓰레기통 행이었다.
주변에서는 남자에게 ‘호구’라는 둥, ‘간도 쓸개도 없는 놈’이라는 둥 염려를 넘어 비난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더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제안도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남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자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남이 보기에는 불쌍해 보이거나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자신은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누가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를 따지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주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는 게 그의 애정관이었다. 결국 남자의 친구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주변에서 모두 얼마 안 가 깨질 거라던 이 커플이 의외로 큰 문제없이 계속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안정적으로 유지될 뿐 아니라, 놀랍게도 결혼 이야기가 나올 만큼 발전했다. 이대로 결혼에 골인한다면 연애 ‘계약직’이었던 남자는 결혼이라는 ‘정규직’이 되어 미생이 아닌 완생을 이루는 셈이다. 여전히 여자의 ‘갑질’과 남자의 희생 아닌 희생은 이어지고 있지만, 남자와 여자 모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채 그 나름대로의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갑이든 을이든 자기 사랑에 만족한다면 누가 덜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 쪽의 사랑 방식이 다른 쪽에게 ‘갑질’, 또는 ‘횡포’로 느껴진다면 그 연애 관계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