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약속한 정식 약혼자나 연인 사이는 결코 아니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연인이 있다'고 소개할 만한 관계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 나면 만나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등 데이트를 하는 관계를 우리는 요즘 '썸'이라 부른다. 누가 먼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세대를 풍미하는 단어는 보통 그 시대와 세대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기 마련이다.
요즘 젊은이들을 흔히 ‘5포 세대’라 부른다. 시작은 경제난과 구직난, 취업난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였다. 그들은 금세 스펙 쌓고 경력 쌓고 직장 구하러 다니고 비싼 등록금으로 나가는 돈 아끼느라 ‘인간관계’ 까지 포기하는 ‘4포’ 세대가 되었다. 이제는 올라도 너무 오른 집값으로 ‘내 집 마련’ 조차도 할 수 없게 된 ‘5포’ 세대라 불리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이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일본 청년들도 저성장 경제난에 연애나 결혼은 물론 돈을 모으거나 미래를 꿈꾸는 것에 관심을 끊고 도를 깨우친 사람들처럼 욕망이 없다고 해서 득도 세대(사토리さとり 세대)라 부른다.
이렇게 살면서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포기’한 세대, 그들은 가장 먼저 ‘연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애가 진지해지면 보통은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작금의 세대들은 결혼 자금도, 육아 비용도 마련하기 힘든 지경이다. 그러니 연애부터 포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썸 탄다’는 말 속에는 미래를 길게 내다볼 수도, 각자의 미래를 꿈꾸며 책임지기도 어려운 ‘5포 세대’의 사랑에 대한 갈구만이 애처롭게 남아 있다.
그런데, 보통은 육체관계까지 가지 않더라도 달콤한 설렘과 가벼운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를 의미하던 ‘썸’이 이제는 이른바 ‘갈 데까지 간’ 사이에도 붙는다고 한다. 성관계까지 맺으면서도 연애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별다른 이성적인 감정 없이 섹스만 즐기고 끝내는 섹스 파트너의 개념도 아니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고, 우정은 아니며, 여느 연인과 다름없는 사이처럼 보이지만 연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쯤 되면 ‘연인’이나 ‘연애’라는 말 대신 ‘썸’이라는 호칭만 붙인 것 아니냐는 반문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썸 타는 사람들은 연인과의 연애와는 확실히 선을 긋는다.
사회 초년병인 A군의 예를 보자. 그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만에 취업한 사회 초년병이다. 취업 준비생이던 기간에는 썸조차 탈 여유가 없었고, 직장을 갖고 나서야 대학 후배였던 여자와 만나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짬짬이 데이트도 하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다녀왔지만 둘 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들의 페이스북 계정은 결코 ‘연애 중’으로 바뀌는 일이 없고, 각자의 친구들도 만나지 않는다. 가까운 지인들은 둘이 썸을 타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 외 가족들이나 직장 동료들이 애인 있냐고 물으면 일단 없다고 답한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으로 사귄다고 해도 일단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그 이상을 생각하게 됩니다. 남자 입장에서는 더 부담이 되죠. 지금 다니는 직장을 내년에도 계속 다닐 지조차 확실치 않은 마당에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는 것은 오랜 과거부터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심각한 경제 불황과 사회 구조의 병폐는 이 기본적인 사회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어놓고 있다. 깊어지기 싫어서가 아닌 깊어질 수 없어서라는 썸남썸녀들의 말을 가벼운 젊은이들의 변명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