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림빵이라고 생각하고 뺨을 날린 유생
외국인들이 한국에 왔을 때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술자리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술 마시기 게임이라고 한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알아서 술잔에 따라 마시면 될 일인데, 서로 먹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어깨춤을 추며 게임을 하는 것일까?
예로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조상들은 음주가무가 특별했다고 전해진다. 오죽하면 왕과 신하가 함께 술을 마시며 놀았던 곳이 역사 유적지로 남아있을 정도고, 심지어 술잔을 놓으면 저절로 물이 흘러 술잔이 움직이는 기술을 보유했을 정도로 술 문화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 기술을 가진 민족이었다.
조선 말 무렵 술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애주가 유생이 하나 있었다. 그는 명석한 두뇌로 일찌감치 과거급제를 했지만 워낙 술을 즐겨 높은 관직에서 번번이 미끄러졌고, 나이가 들어서는 불러주는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름만 번듯한 한량이 되어버렸다.
하루는 느지막이 일어나 공짜 술 얻어먹을 곳 없나 기웃거리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이미 그의 주사가 악명이 높아 술자리에 끼워주는 이들이 없었고, 주막에서도 그에게 외상값을 갚지 않으면 술은 한 방울도 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할 수 없이 동네를 벗어나 한적한 산속까지 걸어오게 된 그는 멀리서 여인들의 노랫소리와 장단 소리를 들어 버렸다. 단걸음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계곡 옆 넓은 바위 위에 곱게 비단옷을 입은 기녀들이 여럿 모여 함께 술을 마시고 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 것이었다. 기녀들은 자기들 끼리 춤추고 노래하며 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 같았다. 하지만 한량 사내의 눈에는 그런 여인들보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술병이 더 예뻐 보였다.
남자가 하나도 없는 자리에 혼자 끼는 것이 조금 눈치 보이긴 했지만 흔들리는 술병에 홀려버린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놀이에 끼어 버렸고, 은근슬쩍 옆에 앉아 안주며 술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잘 놀고 있던 기녀들은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당혹감과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방을 찾는 진상 손님들 때문에 기분 풀러 나온 것이었는데, 진상 중에 진상이 그녀들 쉬는 곳까지 찾아와 또다른 진상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술에 꽂힌 남자는 눈치를 살살 보면서도 손에 잡은 술병을 놓치지 않았다. 기름진 안주며 향이 좋은 술까지,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진정한 애주가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모습에 더 화가 난 기생은 남자가 들고 있던 술병을 뺏고는 사정없이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물 흐르는 소리만 조용히 들리던 계곡에서 남자의 뺨 맞는 소리가 찰지게 울려퍼졌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상대는 양반이었다. 좋게 말해 술 한 병 들려서 돌려보내면 될 일을 뺨까지 때렸다며 끌려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찰지게 뺨을 맞은 한량은 얼굴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에서 분노가 잔뜩 어려 있었다. 뺨을 때린 기녀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량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신의 뺨을 때린 기녀 옆에 눈치만 보고 있던 어린 기녀의 뺨을 사정없이 올려쳤다. 어린 기녀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두가 눈이 똥그래져서 한량을 쳐다보았다. 한량은 히쭉 웃으며 그 옆에 앉은 다른 기생을 때리라고 부추겼다. 기녀가 자신을 때린 것이 뺨 때리기 술놀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결국 그는 기녀들에게 잔뜩 창피를 당하고 그대로 쫓겨났다. 어찌됐건 술은 한 병 얻었으니 나쁘지 않은 게임이었다. 술자리를 좋아하고, 술자리 게임을 좋아하는 건 얼마든지 이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나친 음주는 몸을 상하게 하는 지름길이란 것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