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남성에게 직업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제 2의 자아라고 한다.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부모 밑에서 성장했는지 상관없이 그의 모든 것을 정의 내리는 기준이 바로 직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 할 수만 있다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지방 소도시에 있는 작은 나이트클럽에서 10년 넘게 일을 해온 부장급 웨이터 남자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돈을 벌기 시작한 그는 밤일을 한다는 흠은 있었지만 나름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고, 돈도 꽤 열심히 모은 데다, 지방이라는 특징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쉽게 자신의 커리어를 높일 수 있었다. 오랜 경력으로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할 만큼 능수능란하게 사람들을 상대 했는데, 그중에는 여자를 상대하는 스킬도 있었다.
동네가 작긴 해도 클럽은 클럽이었기 때문에 금요일 밤만 되면 화려하게 꾸미고 나온 20대 초반의 여자들이 꽤 많았다. 이렇게 어린 여자들이 오면 능구렁이 같은 말빨로 그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마지막 맥주 서비스 몇 개로 쇄기를 박아 넣었다. 그렇게 그를 따르는 수많은 웨이터 동생들과, 동네에서 좀 논다는 어린 여자들이 생겨났고, 마치 그 지역의 아이돌 같은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런 영광이 평생을 갈 것 같았지만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단 한명의 여자로 인해 그동안의 만족감 넘치는 삶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서울에서 유학중인 마을 유지의 딸로, 클럽은커녕 혼자 카페도 가본 적 없는 순진한 처녀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그녀는 집안의 자랑이었고, 마을의 보물이었다. 물론 그녀가 서울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마을 안에서는 더 없이 조신하고 품행이 바른 신여성 중에 신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이트 웨이터 부장은 딱 한 번이라도 그녀가 클럽에 들어오면 10년동안 쌓아 놓은 내공을 모두 발산해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 수 있을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에게도 기회가 왔고, 평소에 입던 웨이터 옷을 벗어 던진 채 멀끔하게 차려입고는 그녀의 옆 자리에 앉았다.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리듬을 타던 그녀는 능구렁이처럼 말을 걸고 들어오는 남자에게 순식간에 말려 버렸고,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의 말재간에 휘둘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클럽에서 나와 불타는 밤으로 이어졌을 그였지만 그녀에게 만큼은 그런 얕은 수를 쓰고 싶지 않았다. 둘은 나중에 데이트 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고, 남들이 닭살이라며 치를 떨 달달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첫 번째 데이트에서 시작됐다. 여자가 남자의 직업을 물어본 것이다. 멀쩡하게 양복 입고 앉아있는 남자는 머리 스타일이 좀 요란하긴 했지만 깔끔해 보였고, 꽤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평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이때만큼은 자신의 일을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게 된다. 잠자는 시간을 뺀다면 하루의 70퍼센트 이상을 직장에서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것은 함께 공유하고 공감할만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공감대는 연애 중에 만들어갈 수도 있지만 일상생활을 공존하지 못한다면 절대 오래갈 수 없는 공감대일 뿐이다. 어떤 직업이 귀하고, 어떤 직업이 천하고를 나누는 것보다 자신이 얼마나 당당하게,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진정으로 멋있는 연애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