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앞에서 열정을 놓지 못한 비운의 남자.
일과 사랑, 사랑과 일.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신은 과연 어떤 것을 고를 수 있을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것 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살다보면 둘 중 하나는 적당히 포기하고 살아야 할 경우가 생긴다. 사랑을 선택하자니 밥벌이가 발목을 잡고, 밥벌이만 잡자니 왠지 인생이 조금은 피폐해지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때, 우리는 사랑과 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오스트리아 출신 초기 독일 낭만파 음악가로 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슈베르트 역시 사랑과 일의 기로에서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다. 슈베르트는 그의 음악으로도 유명하지만 죽기 직전까지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린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가난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누나의 지도로 빠르게 음악 실력을 쌓아왔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음악을 독학으로 공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약관 18세때 작곡한 것이 지금까지 가장 유명한 ‘마왕’이라는 것을 보면 슈베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천재성은 그의 생전에 단 한번도 빛을 발하지 못했고,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빈곤과 병마, 굶주림으로 인해 세상을 등지는 비운의 천재작곡가로 세상에 남게 된다. 이런 슈베르트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19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은 가정용 음악의 수요가 갑자기 급등하는 시기였다. 그 전까지 음악을 연주회에서 듣거나 연주가들을 초빙해 음악을 들었다면 이제는 피아노가 대중화 되고 누구든 집안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가 흔해졌다고 해서 모두가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싼 피아노가 집에 들어온 만큼 실력도 키워야 했기 때문에 당시 슈베르트는 귀족들의 피아노 선생님을 하며 가까스로 연명을 했다고 한다. 그 중엔 백작부인인 캐롤린도 있었다.
가난한 교사 집안의 슈베르트와 백작부인의 사랑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관계였다. 게다가 당시 슈베르트가 남자로써 매력을 어필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음악 실력뿐이었다. 외모는 곰보로 형편없었고, 키는 작았으며, 병약하기 까지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남자로 보는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백작 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슈베르트는 백작부인의 집으로 피아노 과외를 가거나 그녀가 여는 사교 연주회에 연주자로 갈 때마다 듣기 쉽고 보기에도 즐거운 연탄 곡을 작곡했고, 그녀와 함께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연탄 곡은 동시에 두 명이 피아노를 치는 연주 방식으로 사교모임에서 꽤 인기 있는 연주방식이었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슈베르트는 그녀를 위한 헌정 곡을 작곡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헌정곡은 지금까지 나왔던 연탄 곡 중 난이도가 극상인, 보통 사람들은 칠 수도 없는 그런 곡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슈베르트의 연탄곡 중 가장 유명한 곡으로 손꼽히는 ‘판타지아’는 슈베르트의 작품 중에서도 해석의 깊이와 집중을 요하는 매우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를 사랑하고, 함께 곡을 연주하고는 싶지만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가장 어려운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웠더라도 이제 막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던 그녀가 전문 피아니스트도 치기 힘든 곡을 소화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슈베르트의 마음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