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여자를 조심하지 않으면 가문이 망하는 건 한 순간이라는 속설이 있다. 물론 요즘에도 여자로 인해 한순간의 욕망을 추구하다가 가족과 명예, 재산을 잃어버리는 사례들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아무리 재산이 풍족하더라도 여인의 치마폭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밑 빠진 항아리처럼 끝도 없이 재물이 빠져나가게 되고, 결국 가사를 모두 탕진해 부자가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옛 조상들의 당부일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역사를 보면 기생의 주머니 깊은 줄 모르고 한 푼 두 푼 넣어주다가 망신을 당한 선비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전해지고 있다.
조선 초기에 이 씨 성을 가진 젊은 선비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시골에서 공부를 하다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온 참이었다. 그의 부모는 지방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유지였고 한양으로 유학간 아들이 편안히 생활 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이 씨는 홀로 올라온 한양 살이지만 한양으로 올라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과거 급제를 위해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뜨내기 시골양반은 한양의 날고 기는 기생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이 씨의 집 옆에는 평양에서 이름을 날리던 모란이라는 기생이 한양 기방에 선출되어 이사를 와 있었다. 이 씨는 이웃에 누가 이사를 오든 관심 없이 글공부에 매진을 하고 있었다. 처음 한양에 입성한 모란은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마땅한 양반들을 물색하고 있었고, 바로 이웃집에 있는 이 씨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모란은 허름한 옷을 입고 전쟁 통에 과부가 되었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이 씨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서 그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상경했지만 기생에 눈 돌리지 않고 여색을 멀리하며 글공부만 매진하던 이 씨는 평범한 옷을 입은 아낙의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게다가 자신의 바로 옆집에 살며 과부가 아닌가. 그 역시 홀아비나 다름없는 몸, 마음만 맞는다면 서로 외롭지 않게 토닥이며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씨는 용기를 내 모란에게 서신을 보냈고, 며칠 뒤 모란은 단출한 술상을 차려 이 씨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오랜 유학생활에 여인의 품이 그리웠던 이 씨는 그대로 모란의 용모와 품위에 반해 버렸다. 그렇게 남들 눈치 볼 것 없이 이웃에 살면서 한 방 살림을 차린 모란과 이 씨는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밤 낮 속정을 나눴다. 이 씨는 모란의 손에 굴러 들어온 다 잡은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모란은 이씨가 자신에게 단단히 빠졌다고 확신할 무렵부터 이 씨의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고향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던 이 씨는 세상물정 모르고 모란이 달라는 대로 줘버리고 좋은 물건 이 생기면 흥정도 안 하고 바로 사다 나르기 시작했다. 알뜰해 보이던 과부댁 모란은 점점 씀씀이가 커졌고, 결국 한양에 있는 이 씨의 재산을 모두 털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골에 있던 이 씨의 부모는 한양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들의 부탁에 이것저것 처분해 올리기 바빴고, 고향에서 온 돈은 그대로 모란의 주머니에 들어가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지방에 남부럽지 않게 살던 유지의 재산이 한양에 있는 기생의 치마폭에 모두 들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씨의 재산이 모두 탕진 됐다는 사실은 모란이 가장 먼저 알았다. 재산이 사라지자마자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모란을 과부로만 알던 이 씨는 그제야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녀가 들어간 기방 앞에서 몽둥이를 들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생의 주머니에 들어간 재물이 다시 주인을 찾아가지 않는 법. 기생에게 쓴 돈을 물리려고 하는 이 씨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결국 원하던 관직에도 오르지 못하고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 한 뒤 폐인이 되어 세상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여자 하나로 인해 몰락한 사례는 이미 수백 권의 책으로도 감당 못할 만큼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보면 여자 혼자만의 잘못은 아닌 게 아닐까. 위험을 알고도 달려드는 것은 바로 남자들이다. 만약 죽음까지 감수할 만큼 사랑하는 여자라면 그 또한 로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