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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 칼럼
너무 다른 성(性)문화, 신라와 조선
최초작성날짜 : 2013-10-07 09:44:08, 글자크기   

 

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신라시대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여파 때문인지 사극은 늘 조선이 낳은 왕, 왕비, 후궁들의 이야기로 점철되었는데, 새롭게 신라의 이야기가 부상한 것이다. 그저 접근하는 나라만 변한 것이 아니다. 조선은 엄격한 유교사상으로 ‘남존여비’, ‘반상의 신분제’ 등이 갈등을 만들어낸 반면, 신라는 여성이 왕이 되어 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여성의 리더십을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과 신라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은 절대 왕이 될 수 없었던 나라, 그 이전에 우리 역사에서는 여성이 당당히 왕이 되었고 정치(政治)를 했다는 것으로 이 두 나라는 성(性)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를 가졌던 나라가 바로 신라라고 말한다. 당시의 유물로 보이는 토우(土偶)에는 적나라한 행위가 묘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런 토우들이 무덤에 부장되기도 했다. 신라인들은 성(性)이 즐거움과 신성함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정절이나 불륜의 개념 또한 없었다. 당시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인 ‘화랑세기’를 보면, 마복자(摩腹子)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임신한 여성이 남편보다 높은 지위의 남성과 낳은 아들을 뜻한다. 이것은 여성의 남편이 동의한 것으로 높은 지위의 남성은 훗날 마복자의 후원자가 된다. 마복자는 두 명의 부친을 갖게 되는데, 혈통상 부친과 정치적 부친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신라지배층 사이에서는 높은 지위의 인물이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관계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에게 마복자의 특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 그 부모가 먼저 나서기도 했다. 이에 여성의 지위가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으며, 남자들의 정치에도 여성의 입김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인들이 마복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는 마복자가 법적으로 화랑의 낭두(郎頭)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은 이 제도가 화랑도의 결속을 다지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개방적이었던 신라시대에 유교사상이 전파되면서 점차 억압되기 시작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이 개국하자, 성(性)은 자유를 잃어버렸다. 아내는 남편과 이혼하거나 남편을 쫓아낼 권리가 없었고, 투기를 하면 쫓겨날 의무만 있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화의 핵심은 모두 아내가 짊어져야 했을 정도였다. 이러니 불륜이나 간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불륜을 엄하게 다스렸다. 태종 때 간통사건으로 사형당한 부인이 있었고, 세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에는 간통 등의 섹스스캔들에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사형을 자제하려는 지배층의 마음과 달리 성종 때 대대적인 사건이 터진다. 종친과 공신을 비롯한 벼슬아치들과 중인에서 노비 등 스무 명과 성관계를 가진 ‘어우동 사건’이 터진 것이다. 결국, 어우동은 사형을 면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는 성(性) 문제가 터지면 종종 사형을 처할 정도로, 제도적으로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억압했기 때문에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불륜은 더 성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 영의정 김재로는 ‘근래 여종의 남편이 처의 상전을 능욕하는 일이 흔히 있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나라에서는 경쟁적으로 각지에 열녀문을 세워 여인들의 정절을 강요했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여성들은 그저 정절 지키는 일에 순종했는데, 이와 반대로 남성들은 첩을 들이거나 기생집을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다. 조선의 성(性)문화는 남성에게만 개방되었던 셈이다.

신라와 조선, 이 두 나라의 성(性)에 대한 관념 중 어느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문화라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성(性)문화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극단적인 조선시대 성(性)문화와 신라시대의 성(性)문화가 공존해서 벌어지는 갈등들이 심심찮게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성(性)문화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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