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무렵 프랑스에서 동판으로 제작된 그림 한 점이 큰 이슈를 일으키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나체로 누워있고 여인이 고개를 돌려 싱긋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아닌 판화 중간쯤에 자리한 탐스럽고 통통한 귀여운 엉덩이에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당당한 제안’ 이었다.
나체의 여인이 당당하게 제안한 내용은 무엇일까? 어느 정도의 학식이 있는 남녀라면 누구든 눈치 챘을 것이다. 여인은 대놓고 남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선 어떠한 천박한 느낌도 가질 수 없다. 여인의 아름다운 뒤태에서 느껴지는 것은 여성 신체의 신비함과 은밀한 유혹이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뒤태가 아닌 정면을 보고 서있었다면 똑같이 신비한 유혹을 느낄 수 있었을까?
몸을 가리지 않고 모두 내 보이며 정면을 보고 있었다면 이 여인의 제안은 부끄러운 유혹이 아닌 천박하고 난잡한 여인의 외설적인 유혹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시대의 프랑스 인들은 여인의 앞모습이 그려져 있는 누드화보다 은근한 성적 매력을 숨기듯 보여주는 여인들의 뒷모습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여인의 뒷모습은 시각적인 측면에선 덜 음탕해 보이지만 관람자로 하여금 더 짙은 상상력을 만들게 해준다. 직접적으로 여인의 성기와 가슴을 보는 것은 품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림 자체가 음탕하게 보이기 때문에 즐겨 그리고 보지 않았다고 한다.
여인의 엉덩이는 그 성적 매력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보통 누드화를 볼 때 여인을 나뭇잎이나 천으로 가리는 경우는 있어도 엉덩이를 가리는 경우는 볼 수 없다. 의식적으로 엉덩이 자체는 유혹의 강도가 세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의 정면을 노골적으로 그린 그림 보다 뒷모습을 그리고 풍만한 엉덩이를 그린 그림은 수없이 찾아 볼 수 있다.
하얗고 부드러운 엉덩이는 탐스럽게 살집이 붙어 있고 발그레한 색감으로 시선을 자극시키고 있다. 회화 속에 나온 여인들의 그림은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누구든 한 번쯤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욕구는 과거 귀족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났는데 여인들의 뒤태를 그린 나체사진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너도나도 주문을 해 응접실에 걸어두고 서로의 그림을 품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노골적인 모습을 직접 보는 것보다 감춰져 있는 성역이 더욱 값져보였다는 의미다. 이렇게 감춰진 성역을 침입했을 때의 쾌감, 정복했을 때의 짜릿함을 상상하게 만드는 은밀한 도구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정면을 보고 보행하기 때문에 자신의 엉덩이를 자주 관찰 할 수가 없다. 때문에 엉덩이는 자신이 스스로 보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에 보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뒤에 걸어오는 사람이 자신의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자신을 알 수가 없다. 때문에 많은 회화에서 여인들의 뒤태가 노출되는 것이고 그렇게 노출이 되어 있어도 큰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뒷모습을 자신 있게 내놓고 당당하게 남자를 제안하는 그림이 신비하고 은밀한 유혹이라고 포장되듯이 여인의 뒤태는 억제되지 않은 욕구 표출과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저돌적으로 이성을 유혹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 뒤태는 남녀를 불문하고 매우 중요한 유혹의 무기가 되고 있다. 남성의 바지 위에 보여 지는 잘 올라가 엉덩이는 여성의 엉덩이 못지않은 유혹의 도구가 되고 있다. 힙업을 연마한 남성들은 탱탱한 사과 반쪽 같은 엉덩이는 각종 잡지에 기재되어 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현상을 그대로 표방하고 있다. 남녀 불문하고 뒤태의 유혹은 누구에게든 관심을 끌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된 것이다.